도서 「여름의 빌라」 백수린 작가 북토크
2021년 1월 30일 저녁 7시
군산 마리서사&ZOOM
인터뷰이 : 백수린 작가
인터뷰어 : 김나은(우만컴퍼니)
백수린 : 단편소설집 「여름의 빌라」는 이름 때문인지 오늘 말씀하신 독자분들처럼 특정 계절을 언급하시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여름에 읽었다.” 혹은 “여름의 빌라인데 겨울에 읽었다.”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여름의 빌라는 많은 계절을 담고 있고 단편소설 치고 긴 시간을 다뤄요. 「여름의 빌라」는 다른 단편집에 비해 한 작품 속 시간의 호흡이 긴 편이죠. 저는 책명을 ‘여름의 빌라’로 했지만, <고요한 사건>과 <시간의 궤적>이 소설집을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단편소설집 전반에서 시간이 흐르고 난 후 관계나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에 집중하고 굵직한 외부의 사건이 아닌 내적으로 극적인 사건들을 다루거든요.
"인간의 내면에서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척들을 나타내고 싶었다."
김나은 : ‘내적으로 극적인 사건’으로 언급하신 것처럼 단편소설집 「여름의 빌라」에서 가장 큰 대립은 단편소설들 속 화자 자신과 과거의 자신이에요. 화자들은 과거를 복기하고 자신이 했던 행위를 후회하거나 사과하기 위해 편지를 쓰는데요.
단편소설집의 마지막 작가의 말(p. 289)에도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므로.”라고 써주셨는데요. 타인과의 대립이 아닌 자기 스스로의 대립을 중심적으로 배치한 이유가 있을까요?
백수린 : 저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 가에 집중하고 싶었어요. 사람의 마음 안에는 늘 형태와 빛깔 등의 감각이 바뀌는 결들이 있는 데 그런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고, 그걸 보여준다면 소설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소설은 내면의 생각을 담기에 적합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소설은 언어로 그리는 작업이고, 느린 시간을 통해 아날로그적으로 전달할 수 있으므로 인물의 내면을 전달하는데 최적화되어있잖아요. 인간의 내면에서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기척들을 나타내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설 속 내용들이 극적인 외부의 대립보다는 고요한 사건 속에 내면적인 내립에 중점을 두고자 집중했고, 그러다보니 나와 어제의 나, 나와 과거의 나를 그리게 된거죠.
김나은 : 내면을 보여주는 데 소설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씀과 이어질 수 있을텐데요. 다른 인터뷰에서 “언어라는 건 투박한 도구이기 때문에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아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고. 오독(완벽하게 이해 될 수 없을)될 것이라는 걸 확신한다. 소설은 언어를 가지고 쓰는 작업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불안이나 두려움이 있다.”고 하셨어요. 오독에 대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쓰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백수린 : 언어는 오독될 수 있다는 한계를 알고 있지만 일상의 언어와 달리 문학의 언어가 줄 수 있는 매력이 있어서 소설을 쓰고 있어요. 일상의 언어는 A=A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문학의 언어는 A=A´, A=B, A=C처럼 많은 해석이 나올 수 있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비유라든지 상징을 경유해서 표현해야 하고, 경유의 과정에서 유희와 즐거움 그리고 감동이 생겨요. 그 격차가 작가가 누릴 수 있는 가장 즐거운 자유라고 생각하고 그것에 매력을 느껴요. 그리고 제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게 글을 쓰는 거였기 때문에 소설을 쓰고 있어요.
김나은 : 북토크 초반, ‘독자들이 말하는 도서 여름의 빌라’에서도 작가님의 소설이 인상주의 그림같다는 감상이 있었죠. 북토크에 앞서 저희 우만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수다’의 시간을 가졌는데요. 이때도, 현주님(군산 마리서사 책방지기)께서 작가님의 책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과 같다고 언급하셨어요.
제가 볼 땐, 이 평이 디테일한 소설 묘사에서 오는 감상일 수도 있지만, 소설 전반에 담긴 쓸쓸함이 그의 그림과 결이 비슷하고 작가님의 단편소설들 속에서 정확한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는 인물들(‘시간의 궤적’에서 언니, ‘폭설’에서 엄마)과도 비슷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커피마시는 여인’처럼 말이죠. 작가님은 이 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백수린 : 사실 제 책을 보고 그림 같다는 평을 많이 들었어요. 주로 풍경화같다고 하시기도 하고, 책 표지로 사용된 알프레드 시슬리의 다른 작품이나 화가 모네의 작품을 언급하시는 분들도 있었죠. 개인적으로 에드워드 호퍼 작가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제 책과 연관되어 처음 언급되어서 매우 기쁘고 흥미롭다고 느꼈어요. 저도 두 작품의 공통점을 생각해봤는데, 말씀하신 것처럼 책에 담긴 쓸쓸한 정서가 연결되고 익명성 때문인 것 같아요. 소설 속 인물들과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 대부분이 내면의 고독, 즉 실존적 고독을 가지고 있잖아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하고자 외부의 소란을 최소화했다."
김나은 : 여름의 빌라에서 대립은 화자 스스로 내부적으로 일어난다면, 외적 대비는 화자와 그 주변의 인물들로 일어나는데요. ‘시간의 궤적’에서 언니와 나, ‘고요한 사건’에서 해지(그리고 무호)와 나, 폭설에서 엄마와 나, ‘아직 집에가지 않을래요’에서 한나와 나, 아카시아 첫 입맞춤에서 다미와 나의 대비가 있어요.
흥미로웠던 건 대비가 일어나는 인물과의 관계에서 대비되는 인물과 나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열등감, 죄책감 등의 감정들이였어요. 하지만 한 번도 쌍방으로 충돌하지 않고, 언제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말을 하죠. 폭설에서 엄마에게 화자가 화를 내지만, 엄마가 지나치는 것 처럼요. 이것이 작가님만의 ‘공존’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요. 인물 간의 관계를 이렇게 구성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백수린 : 인물들의 외적 대비가 보인 건, 제가 가진 욕망(혹은 로망) 두 개를 분리시켜서 두 인물에게 주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안주하고 싶은 욕망과 탈주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서로 다른 욕망이기에 외적으로 대비가 되었지만 제가 집중하고 싶었던 건 ‘나’라는 인물의 내면의 고뇌와 ‘나’와 ‘나(과거 혹은 지난)’의 대립이었기 때문에 외부의 대립은 크게 부각시키지 않았어요. 그리고 타인의 대립이 강조되면 내면의 변화가 포착될 수 없잖아요.
외부가 소란하고 너무 빠르면 내면에 집중하기 어렵기 때문에 보다 내면에 잘 집중하고자 외부의 소란을 최소화 한 거죠. 제가 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가 생각했을 때, 소설이 21세기에 유의미하기위해서는 내면에 집중하는게 좋다는 결론이 나왔어요. 외적으로 극적인 것은 다른 언어와 영화 등의 매체로 효과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요. 사실 <고요한 사건>의 고양이 아저씨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엄청난 사건이죠. 그런데 내면에 집중하기 위해 고양이 관련 이야기는 짧게 지나가며 분량을 줄였고 주인공 내면에서 발생하는 변화에 집중해 분량을 많이 줬다. 소설은 작가가 하고 싶은 메시지나 방향에 따라 선택과 집중이 필요해요.
김나은 : 외부가 소란하고 너무 빠르면 내면에 집중하기 어렵다는 게 공감이 가네요. 단편 소설을 쓰기 전에 갈등 구조나 전체적인 걸 구성을 짜놓고 이야기를 쓰시나요?
백수린 : 그럼요. 구조를 그린 다음에 작업을 합니다.
김나은 : 단편소설집의 마지막 작가의 말(p.289)에 “아직 집에 가지 않을래요는 미국 여성작가가 19세기 후반에 발표한 어떤 단편소설과 브라질 여성작가가 20세기 중반에 발표한 어떤 단편소설을 읽은 후 그에 대한 21세기 한국 여성작가의 응답을 보내고 싶어 쓴 작품이다.”라고 창작의도를 설명해주셨는데요. 이것이 어떤 응답이었는지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백수린 :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는 브라질 작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장미를 본받아>(도서 「달걀과 닭」에 수록)와 샬롯 퍼킨스의 <누런 벽지>를 읽고 쓴 작품이예요. 구성이나 풀어가는 방식도 전부 달랐지만, 두 소설 모두 집, 아이 등으로 표상되는 중산층 여성이 내면에 숨겨져 있던 욕망을 발견하고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가 다르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두 작품에서 비슷하게 느꼈던 것을 21세기의 아시아 여성(작가)의 텍스트로 답해보고 싶었어요.
중산층의 여성이 억압되어있고 그것에서 느끼는 걸 쓰고자 했어요. 소설<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를 쓸 때 '집'을 부셔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오정희 작가님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제가 쓸 때는 19-20세기에 담긴 여성의 우울감 혹은 히스테리한 모습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썼습니다. 소설 <아직은 집에 가지 않을래요>는 주인공이 고유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며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나은 : 19세기, 20세기, 21세기에 걸쳐서 브라질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작가들이 만들어낸 텍스트가 흥미롭네요. 각각의 결이 다른 게 페미니즘의 변화나 그 정체성 같이도 느껴지기도 하고요.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나은 : 최근에 발표된 기욤뮈소 작가의 신간에서 작가들이 만들어낸 소설 속 인물이 어느 순간, 작가의 컨트롤에서 벗어나 자가 발전을 하는 설정이 있는데요. 만약 작가님이 만들어낸 인물 중 한 명이 도발을 한다면 어떤 인물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요?
백수린 : 소설 속 결말 이후의 상상인가요?
김나은 : 소설의 마침표가 찍힌 이후일 수도 있고, 혹은 마침표부터 모든 걸 지우고 다시 쓸 수도 있어요.
백수린 : 음, 소설 이후 결말로 말하자면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소설 <아카시아 첫 입맞춤> 속 인물을 떠올렸어요. 가장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죠. 평범한 은행원으로 성장한 것처럼 결말이 그려졌지만, 분명 그 안에는 성기를 달랑거리며 돌아다니는 수컷의 개를 내면에 품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에요. 분명 그 안에는 재미있는 욕망이 더 많을 거예요.
김나은 : 작가님의 캐릭터들은 모두 욕망을 내면에 품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발화되고 발현되는지에 차이만 있을 뿐 사실 저마다 다른 결말들로 살아갈 것 같아요.
백수린 : 맞아요. <시간의 궤적>의 인물도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죠.
김나은 : 오늘 참여하신 관객분의 질문입니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해는 오해로, 사랑은 혐오로 너무 쉽게 상해”버린다고 하셨는데, 작가님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이런 혐오의 시대를 어떤 마음으로 헤쳐나가길 바라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질문을 조금 덧붙이자면, 코로나19로 인해 우리가 잊게 된 작지만 소중한 감정들을 작가님의 책을 통해 복기하고, 작가님이 쓰신 말처럼 ‘사람 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 같기도 한데요.
'아주 찬찬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
백수린 : 사실 작가의 말에 쓴 것이 제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인 것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이해는 오해로 사랑은 혐오로 쉽게 변질된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고 특히 요즘에는 그런 생각을 더 많이 생각하고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쉽게 상하고 물러져버리는 것들을 ‘이렇구나’하고 포기하고 살아가지 않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이때 노력이라는 건, 제가 소설가로서 생각할 땐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짐작해보는 것 입니다. 신기한게 사람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자신의 경험으로 미루어 상대를 짐작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북토크 2부의 시작 작가의 낭독 때 소설 <폭설>의 마지막 부분을 읽었는데, 그 부분(p.137~138)이 사실 제 정서와 가장 가까이 맞닿아 있는 장면이에요. 저는 이 장면을 쓸 때도 슬펐고 읽을 때도 슬픈데요. 이때 엄마가 말하잖아요. “우리가 아무것도 치지 않고 고속도로를 빠져나왔다니 참 운이 좋구나.” 저는 그건 정말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우리의 욕망대로 살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릴 뿐인데 사방은 너무 어둡고 튀어나오는 동물들은 그 역시 자신이 치일 줄도 모르고 자신의 삶을 사는 거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너무 어둡고 컴컴해서 우리는 의지대로 가는 길에서 필연적인 것처럼 동물들을 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동물을 치지 않는 다는 건 정말 운이 좋은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사람과 사람사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무지함, 우리에게 주어진 오해할 수밖에 없는 조건들 때문에 그 어둠이 너무 깊어서 누구를 칠 수 밖에 없음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헤드라이트와 같은 아주 조그만 불빛에 의지하여 살 수 밖에 없잖아요. 저에게 그 불빛이란 아주 찬찬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쓰는 것이고, '우리는 아주 미약한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요 앞, 작은 반경까지 밖에 볼 수 없지만 저속하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면서 애쓰는 것 밖에 할 수 없지 않나'라고 생각해요.
김나은 : 저희가 앞부분에 이야기한 부분과 맞닿아있는 것 같아요. 외부의 소란이 크면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저희의 속도고 너무 빠르다던가 내 앞만 보게 된다면 미약한 하이라이트로 인해 주변을 칠 수 밖에 없고 치고도 모르잖아요. 그런데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내가 걸어온, 그리고 가야할 길을 돌아보면서 간다면 서로가 오해나 무지로 인해서 다치거나 혐오하여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겠죠.
김나은 : 이제 행사의 마지막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순간은 음악에 담겨서 추억이 되기도 하잖아요. 북토크에 참여해주신 독자분들이 오늘을 기억하실 수 있게 노래를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
백수린 : 가수 이소라의 ‘신청곡’을 추천하고 싶어요.
‘신청곡’은 어떤 디제이에게 말을 걸면서 음악이 나를 위로해주고, 음악을 통해서 내 감정을 말하는 내용이 있는 가사가 있는 아름다운 곡인데요. 물론 제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독자분들에게 위로만 주기 위해서 쓰는 건 아니고, 문학의 기능이 위로에만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통해 우리가 만났을 때 위로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세상이 왜 이렇게 외롭지”라고 생각할 때 “아 저 작가가 나의 외로움을 아는 구나”를 통해 위로를 받을 수도 있고 “나는 왜 이런 감정이 들지”라고 생각할 때, 어떤 작품을 통해서 “아 이 작가가 이런 감정을 알고 있구나”를 통해 위로를 느낄 때도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문학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별히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고, 문학 작품을 통해서 작가와 독자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그것이 어떻게 보면 노래 ‘신청곡’과 연결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DJ는 아니지만 여러분에게 DJ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담은 신청곡을 들려드린다는 의미에서 여름의 북토크 관객분들에게 이 노래를 추천하고 싶습니다.